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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SPIRIT IS RAISED TO THE TEMPLE OF HEAVEN > My spirit was lifted up so high and very quickly in that I reached the temple of God in heaven I saw Jesus Christ standing in the center of the temple in heaven. I was directed by the Lord in the temple of heaven to continue the work of God I am in the process of delivering The Word Of Heaven today. 2020년 현재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상에서 온라인 설교 사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덕수 목사입니다. 사역자의 영이 천국으로 올려져 천국 성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 후 주님의 명령에 따라 온라인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정통 신앙과 한국 기존 교회들과의 신앙적 기준에서 개념 차이가 나고 있는 부분들에 관해 한글 개역 개정판 성경과 NIV, NEW KING JAMES VERSION BIBLE을 상호 비교해 가며 설교 사역을 진행 중입니다. I will tell the kingdom of heaven about the will of God who is speaking to him personally about the life of modern believers living today.

2017년 3월 23일 목요일

아이스께끼 하나 더 줘


2017 3 22일 수요일
오후 12:17
TODAY'S GOD MESSAGE    ( 2017/3/22 )

THE CITY OF DAVID,  ONLINE CHURCH
PASTOR. DUK SOO YOO
오늘의  다윗 성 온라인 교회 말씀
       작성자;  유 덕 수 목 사



         ( 오늘의 단상 )
 우리들의 시대를 바로 세워 갑시다!
오늘의 스토리(TODAY'S STORY) 주제는
지나온 거사의 회고 부분입니다.


<우리들의 세대가 지나온 과거속에 일그러진 시대의 자화상>
가난과 척박한 불모의 땅에서 경제 발전을 일구어
각박해진 과거의 세대가 그들 만의 생존을 위하여
바르고 선한 삶을 단죄한 경우도 있었다는 점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들은 오늘 과거로 들어가 시간을 되돌리는 타임 머신을
타고서  오늘의 주역 세대 이전의 과거속으로 들어가
오늘의 스토리를 전개해 가게 됩니다.



<오늘 스토리의 배경은
대한민국의 1960~ 1980 시점부터 이야기가 됩니다>
한국의 여자들은 집에서 머리털을 가위로 잘라 팔면
그것을 수집한 수집상들은 머리털로 가공한 가발 다발을 만들고
수출 품목으로 가발을 배에 선적한 가난한 빈털터리 수출 한국
쌀이 떨어져 궁핍함이 가져다 빈주머니 인생의 길을 걸었지요.
배고픈 인생은 머리를 싸매고 생존의 현장에 남의 서정 보지 않고
달려들어 거지 깡통을 두드리고 속이고 강탈하며 살게 됩니다.




우리 과거의 세대는 이처럼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살았지만 식수가 끊긴 수도를 보고 식수차가 동원된 곳에
양동이를 들고 가지만, 어떤 서울의 지역은 수도는 끊겨
우물 10m 넘는 물속으로 두레박을 내려 뜨려
물을 길러 다니면서 개천가 가재가 놀았던 서울
지역의 흐르는 개천, 얕은 물가로 가재 잡으러 가고






초땡 (초등 땡꼬마) 시절
동네는 저급 우유도 부족했던 차라 부족한 유지방 공급을 위해
유니세프에서 무상으로 한국 동네로 공수된 무상 배급품에
어린 아이들은 웃음 지으며 딱딱 해진 고체 유지방 덩어리를
구호품으로 받아 먹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유지방과 같이 공수된 빨간 풍선을 불면서 살았지요.
비참한 가난한 한국은 사람들 마다 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달려드는 비굴함을 일삼는 경쟁 구도속에 살면서
악마 같은 악만 남았던 시절 여름 런닝도 없어
배꼽이 드러났던 시절 그들 후손은 무럭 무럭 자라나
배꼽 없는 티를 아버지의 대를 따라 선호하고



시대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정상적이고 올바른 선을 따르고
성실하게 사는 인생의 기준을 생존 경쟁을 위해서
악으로 죄하기도 했지요.

시대적 관점하에서는 살아 남기 위해서 악을 일삼고 살아가는
악만 남은 생존의 길에서 길을 따르는 착한 삶의 방식은
사치스런 생활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생존을 위한 막다른 골목길 선과 악을 보는
생을 바라 보는 관점이 크게 달라질 밖에 없던 시대
성공과 번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치열한 상황에서는
생각하는 기준에 차이가 벌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드센 인간 휴먼 종족들은 소리만 소리 질러 대고,
머리끝 까지 악만 남은 다구리로 적을 몰아 대고
각박한 인생을 살고 세대 사카린 겨란형 얼음 덩어리
맹물 아이스 께끼만 먹고, 고작 해봐야 출시된 호떡
삼립 식품 밖에 없던 놀이 시설 없이 놀았던 시절에
말까기로 던져 놀고, 틈에 이름 없는 두꺼비로 태어나




들꽃과 같이 이름 없이  야생화 인생을 길을 살게 되고
삶의 길목에서 생존을 위해 선과 악을 구별하지 않던
오히려 악을 생존의 덕목으로 선호한 사람들이
살게 되는 곳에서 삶을 보는 생존의 기준이 달라지게 됩니다.

선한 사람들이 살아 가는 삶의 방식은
바보<IDIOT> 길이 되고

아마 이런 오늘의 상황에서는 악을 일삼는 시대가 낳는
가차 없는 비열하고 야비한 삶에 적극 패배자로
전락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한 차원에서 우리는
악에 대처하기 위해서 정답을 찾기 위해서
신앙안에서의 현명한 정답을
다윗의 시대에서 찾게 됩니다,
다윗의 시대도 우리의 시대와 같았을 것이라 봅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사울 왕의 극한 발작적인 광포한
시기심으로 불타 올라 다윗을 추적해 죽이려 했던
피로 물든 사울 왕궁의 복수심의 잔혹성이
사악한 현실을 이루었고
이스라엘을 위해 목숨을 걸고 골리앗 과의 싸움에 출전한
다윗의 공적이 오히려 피로 물든 표적 대상이 되는
결과로 순식간에 죽음을 부르고 피를 부르는
현실로 바뀌었음에 디윗은 기도하게 됩니다.

가나안 종족들이 주도권을 시대,
블레셋 이방인 중심 시대가 흘러 갔고,
타임 머쉰을 타고 다윗이 초청예배 강사로
오늘의 시점에 들어 수만 있다면
우리는 신앙안에서 악한 현실을 대처하는
정답을 들을 있게 됩니다.

똑같이 악한 현실에도 상황을 역전시키는  적을 향한
전세 역전이라는 생의 인생 반전 역전 카드를 제시한
복수의 칼이 적의 심장을 꿰뚫고 우리를 향해
칼을 빼든 이방인들과 다윗을 죽이려는 현실을 보게 되지요.

당시 사울을 추종해 다윗을 죽이려 달려든 사울 왕궁의
3000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주둔 지역의 수비대요
추적대(GARRISON) 역할을 충분히 수행한 개리슨 유격대
군사들을 무찔러 공격했을 것이라.

오늘의 야비하고 비열한 치열한 경쟁적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다윗의 공격적 침노 신앙안에서
현실의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를 해결 있는
정답을 찾을 있게 됩니다.

삶의 방식 차이에서 시대별로 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고,
생존을 바라다 보는 생의 인식관이 다르고
생존의 길이 기본적으로 많이 다르기에

우리들의 주변이 때는 인간이 악을 토하는 악의 행위를 솔직한
행위로 인정하는 시대가 이미 지나가고 있고
사람의 행위가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마음과 일치 ,  
적자 존을 위한 선의 기준으로 악을 정상적인
경쟁력 있는 진실된 삶의 행위로 막무가내로 설정할
진실로 바른 길을 걷는 사람들이 그곳에서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악의 기준에 사람들에 의해서
선한 사람들이 무능한 인간형으로 저평가 ,
바른 행위에 사람들을 오히려 헐뜯고 참소하는 행위를
정당화 시켜 선을 지키려 하는 행위를
위선죄로 무고하는 사람 들에 의해
선한 인생들이 그들 각자의 삶의 일터의 현장에서
희생 당하고 너무 억울한 피해를 겪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변론하려 나서지만,
우리가 겪는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려고 기도하지만,
스스로를 변론하려는 기회를 만들고 싶은 상황에서
상대방이 우리의 변론할 기회를 결코 허용하지 않거나
허용이 없는 그런 갑갑한 상황도 오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풀리지 않는 그런 억울함의 상황이 오늘도 지속되고
풀리지 않는 고통이 오랜 세월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는 들이
어제의 괴로움이 오늘을 살고 있는 나의 시련으로 계속 다가와
오랜 기간 동안의 괴로움의 순간을 쌓았고,
오늘의 우리의 고통을 지속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경쟁 상황 속에서 힘을 가지고 강자의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 시대의 헤게모니를 쥐고 항상 루져로 우리를 내리 깔고
압박하려 했던 그런 무리들이 있었지요.
먼저 기득권 우위를 점한 자들을 향해 말로 이해 납득시키려  했지만
상대방은 우리의 말에 귀를 막고 우리의 생존 의지를 무참히 밟고
살았기에 참는 것이 한계가 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수시로 적극 변론하려 들지만,
정당한 나의 주장임에도 상대에게 비굴한 변명처럼 들려지는
입장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서운한 현실적 상황이
나에게 변론할 기회 마저 무참히 묵살할 때를 봅니다.

자신을 상대방에게 온전히 납득 시키려는 행위로서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처한 나의 입장의 어려움에 관해
상대방의 이해와 동의를 얻어 협조를 구했고,
난처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음에도
다가온 삶의 난제 자체가 좀처럼 해결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더욱 낮춰지고 그로 인해 슬픔 뿐인 인생의 때를 지나고
안타까운 괴로움 만이 쏜살같이 흘러가 붙잡고 싶은 시절
호시절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와는  멀리 간격을 두고 흘러가는 시대라는
냉혹함이라는 자루를 삭막한 현실을 봅니다.
나와 멀찌감치 동떨어져 워낙 이해 관계에서 벗어난
냉혹하게 변한 싸늘한 차가운 주변의 상황을 만날
나의 관점과 시각과는  다른 그들 나름대로는
객관적이라 말하고, 평가하는 기준에 의해
우리가 단죄되는 현실에 놓여질 ,

나의 생각과 판단 기준들이 나는 항상 옳다고 여기지만
우리와 다른 상대방이 너무 다른 존재라는 것과
그들의 잔혹한 편견에 의해서 무참히 묵살 당하는
우리의 비참해진 모습과 비굴해진 현실에서
굴욕감의 분노로 가득 채워진 나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거울에 비춰진 나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보고,
나는 아직도 변화를 거부하고 변하기를 거절하고 있는
터줏 대감이라는 시대라는 거인이라는 존재를 보면서도
진작 자신은 아직도 존재감 없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잘 없는 위치에 만족하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는
나의 부끄러운 현실을 보기도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살기 위해 바둥대고 발버둥 치지만
나를 위한 현실은 오늘도 우리를 위해 동등한 기회의 땅을
열지 않고 있고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위해 종을 울린 적도
없었고, 말을 하지도 못하고 살게 되지요.

기득권 사회는 그들 만의 상류 사회 계층이란
그들 만의 리그를 구성해 우리를 거절 비밀리에
비번을 걸고 우리가 접근할 기회를 거의 막아 버렸고,

기득권 계층인 중류, 상류 사회로 들어 있는
기회의 문을 닫아 버렸다고 소리쳐 외쳐 대지만
허공을 치는 메아리로 되돌아
반응 없는 소음처럼 들려지는 현실을 보게 됩니다.
 
동등한 기회를 허용하는 삶을 개척해 있는
동등한 삶의 기회를 열어야 한다고 외쳐 댑니다.

아직 내가 처한 상황에서 낮은 입장에서 보는
이해의 관계의 생존을 바라보는 낮은 시각의 외침이
귀를 막은 기득권 시대에 의해  한번도 기회의 땅이
쉽게 열리지 않고 있음에 분노하고 살게 되지요.

우리들도 누릴 있는 삶의 권한이 막혀졌기에 분노하게
되지만 우리들이 차지해야 기회의 땅은 쉽게 열리지 않는
우리가 거주하는 버려진 척박한 불모(BARREN) 땅에서 울며

우리들의 삶의 권리와 권한이 정식 문건상으로 접수된 적이
없기에 오늘도 남의 밑에서 하인처럼 밖에
억울함의 신문고를 울려 우리를 위한 호소가
사회로 접수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아닌 남을 위한 행진 만을 걷는 어리석은 처세 만을
일삼고 이리로 붙고 저리로 붙고 빈대 붙어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격노의 격한 감정 속에 밀어 넣어 슬프게 만들지요.

기득권의 삶의 이해 관계에서 너무나 멀리 빗겨 탈락된
우리는 인생의 낙오자, 삶의 패자라는 듣고 싶지 않은 ,
루져(LOSER) 입장에서 밖에  없지요.

타인들은 자신 외에 남의 입장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 만이 겪는 고통 만이 극심한 고통이라 말하지요.
현실에서  감내하기 힘든 괴로움과 고통을 겪으면서
힘든 삶을 자신이 아닌 남도 그렇게 살아갈 밖에 없는
남의 괴로운 현실을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지요.

오직 자신들 만이 겪는 고통 만이 극한 괴로움에 해당되고
상대방이 상당히 괴로움을 느끼고 있음에도
자신의 고통은 너무 고통에 해당이 되지만
상대방이 겪는 고통은 별것도 아닌 하찮고 평범한
약한 고통을 겪으면서 엄살만 피우면서 살고 있다고
간주하게 되지요.
(그래 너희들 마음대로 말해 봐라 넘들!)

그들이 남을 위한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을
우리가 처한 상황은 너무 삭막해 지고 결국 우리 사회 전체를
어둡게만 만들고 우리를 너무 서글프게 만들게 된다는 점입니다.

<지난 1980년대 세대 이전의 과거의 직장 생활 문화>
우리의 적들이 자신의 입장 만을 내세워 비열한 악의 행위를
옳다고 강압적으로 관철하려
극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당장 불끈하지만
생계라는 끊어지기 쉬운 밥줄이 목에 걸려져
대롱 대롱 절벽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상태라 아찔해 지고,

우리는 분노하지만 그런 상부 조직에 직장의 상사에게
그들과 한번이라도 욱하는 감정으로 상대와 의견이 충돌해
나의 그런 반격적 행위를 표현할 상사와 대화는 중단되고
거의 소통이 막혀 당장 쫓겨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지요.
사건이 전혀 수습될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밥줄마저 끊겨지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만이 우리를 그늘지게 만들게 되지요

상대의 일방적 관점이 우리를 향해 인권을 복종을 요구하며
날마다 우리를 괴롭혀 아직도 살아있는 자존심을 꺾고
우리 스스로를 낮춰 충돌이 벌어진 상황을 해결하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꺼려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음에도
그들과 만나 대화를 필요성이 필히 요구되는 상황에서

상대방과의 교제와 대화를 통해서
직접 해결해 보려 하기도 하고
상대방에게 우리의 생각을 전해
정확히 전달하려고 대화를 시도했다고 할지라도

<난처해진 상황을 타개하려 들지만>
상대방이 우리를 보고 말하는 들이 과거와 같지 않고
어느 부터 갑자가 차갑고 싸늘한 시선과 냉대 남고,
갑자기 순식간에 돌변한 상황으로 바뀐 것을 느끼게 되고
우리의 반복되는 일상에 행동에 분노를 품은 상대가
우리를 보는 시각이 매우 분노로 치닫는 달라진 현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 너희가 그런 행위를 멈춰야 한다!
 일방적으로 독선적 행동을 일삼는 행위를 거듭해
  옳다고 여기느냐? "

항상 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항상 우리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우리는 그런 나쁜 상황이 오는 것을 미리 막고
내가 적극 나서 나에 대한 상대방이 느끼는
증오심과 오해를 풀려고 닥쳐온 난국을 타개해 가려 하지만

상대방과 불화를 낳는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상대방으로 부터 거의 이해할 없는 나쁜 말만 듣게 되고
그들과 따뜻하게 의견의 일치를 거둘 없는 상황에서
악한 감정만 싸이게 되는 소통의 부재를 낳는
그런 악순환 만이 거듭되는 어두운 날을 만나
번민 속에서 괴로운 밤을 지새우게 때도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우리를 때는
우리에 대한 오해가 연속되는 상황이 오게 됩니다.
아무리 상대에게 오해를 풀어 납득시키려 들어도
오해는 풀리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주장들이 상대가 이해 가능한 범위안에서
상대에게 정당한 주장으로 거듭 말해진다고 할지라도
거의 상대방에게 우리들의 바르고 선한 주장이
거의 납득이 되지 않고 오해 만을 일으키는
거의 이해 불가능한 상황 만이 이어져 우리가 시도한
우리의 난처한 입장을 수습하려는 그런 행위가


<수습하려는 나의 시도가 오히려 일의 낭패와 엉망을 낳고>
그들에게는 오히려 더욱 갈피를 못잡아 종잡을 없고
어수선한 수습 불가능한 상태를 거듭 낳게 됨으로
결국은 대화는 악화된 상태로 치닫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이 우리의 의도에 따라서 쉽게 해결되어
난국이 수습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 아니라
파국으로 치닫는 오히려 나쁜 결과를 낳게 되고

상대방으로 부터 우리 입장에 대한 이해를 얻어내기는 커녕
소통 부재라는 더욱 불편한 상황 만을 낳게 되지요.

우리에게 그들이 불쾌함 만을 불평속에 토로하고
격한 분노의 감정을 느끼면서 쌓여진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에게 대화 값어치 조차 없는
그런 부류의 아이들이라 인식하고
그들은 일방적으로 생각하기를

" 저들이 그들 만의 이중적 잣대를 갖고 거짓말의 기준을
우리에게 거듭 주장 뿐이다" 라고
 
상대방이 그들의 입장의 기준에서 기준 하에서
우리를 혹평해 나쁜 말들을 계속적으로 토해 내며
자신의 기준에서 자신들 만이 옳다고 우리를 나쁘게 평가하는
말을 계속 털어 놓게 된다는 점입니다.

<고립되는 이유를 개선할 있다면?>
우리들의 의식이 주변의 사람들과 다를 경우
여기서 우리는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로 들어가
소통의 부재속에서 항상 고립되지요.

상대방과 대화가 불가능 하게 되고 따로 떨어져
혼자 남게 된다는 점이 주변을 향한 우리의 소원한 감정으로서
서운함을 낳게 되지요.
결국은 고립을 낳는 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지요.


<시대는 우리를 고려하지 않고 흘러 갑니다>
아빠 자신은 때로 자신 만의 혼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시대는 자기의 몫을 한꺼번에 남기지 않고
송두리째 모두 자기의 몫으로 취하려 들게 되고
아빠와 달리 함께 동행하기를 거의 원하지도 않으며
어려움에 처한 아빠를 배려하려 들지도 않고
그들의 탐욕을 포기하려 들지도 않게 되지요.

생존을 위해 자기만을 위하고 자신 만의 삶의 방식을
선택한 길을 걷는 시대는 남을 배려하지 않고 달려 가기에
시대는 자신이 선택한 악한 길을 따라서 걷기에
우리도 역시 자기가 생각한 방식 대로의
남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길을 걸어 가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시대가 항상 잔혹한 길을 선호해 왔기에
선을 지켜가는 방식으로는 쉽게 악한 현실에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어 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겪는 어려운 상황인 잔혹한 현실 앞에서
이스라엘의 다윗을 불러 호출하고 싶지요
과연 오늘 이란 현실 속에 다윗이 살았다면
다윗은 우리에게 충고할
사악한 현실에 어떻게 대처하라고 말했을 ? 라고
생각하게 되지요.

  
아빠를 위한 말을 우리가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빠의 주변과 가족 들이 아빠를 의지하는 상황에서
아빠 자신이 시대의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낙오되고 혼자 고립될 경우

아빠의 주변 사람들과 가족 들이 어려워 지게 되고
우리가 처한 삶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거나
난제의 상황들이 산적해 있음에도
해결 자체가 거의 불가능 해지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나서지 않게 된다는 점입니다.


<결과도 없고 소득도 없는 현명하지 못한 싸움>
아빠는 아빠 자신이 나서 총대를 메고 주변과 싸우지만
우리는 아빠의 입장이 아닌 그런 다른 관점에서 보고
아빠의 입장 만을 이해 하려만 들지 않는
우리의 입장에서만 생각해
아빠의 행동을 다른 시각에서 보게
아빠는 서운한 감정을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빠가 싸우는 것을 보지만 주변 사람 모두가
온전히 아빠의 견해와 일치 수는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빠는 점차 나이가 많아 지지만
그런 아빠를 향해 우리는 기도로 돕게 되지요.
그러나 기도로 돕는 다는 것은 현실이 개선되거나 변하지 않는
사실상 그런 한계만 드러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뿐이지요.
나이가 자꾸 들수록 현실은 우리를 외면 있다는
점입니다.

<아내의 외면>
Marcus  Junius  brutus
~ 브루투스,  ~ 부루투스 
oh 마저도 나를 ~>

아내는 아빠를 때로는 위하기는 하지만
아내가 자신을 위해서
아빠를 외면하고 있다는 결과를 보게 되지요.


<GOING ON MY WAY >
아빠는 스스로 길을 가고
스스로 활동하고 움직이지만
진정으로 아빠를 위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
슬퍼지지 그냥 참고 그대로 가고 있지요.

아빠는 스스로 기업을 세우기를 원하기도 하지만
어느 누구도 돕지 않는 경우 거의 불가능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지요.


<마음이 아프다>
우리들의 꿈이 그저 생각에만 머물 경우
아무런 결과가 없다는 점을 느낄 마음만 상하게
됩니다.

아빠는 자신의 입장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려
성공 가능성의 길을 남에게 적극 표명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말에 응할 어떤 필요성이 없고
아빠의 펼쳐진 주장에 따른 개인적인 사적인 견해에 대해
자신이 따라갈 만한 필요성이 거의 없기에
자신의 행위를 통해 아빠의 주장에 동참할 필요성이
거의 없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지요

<주변이 일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이유>
다른 나이든 아빠 주변의 사람들은
거의 평생이 이미 훌쩍 지났기에
새로운 꿈을 싫은 아빠의 주장에 따른
그런 행위적 시도를 유발할 만한 동기 부여가
거의 되지 않고 있기에 
아빠의 걸어갈 길에 관한 거의 관심을 표명하지 않는
상황 만을 낳게 된다는 점을 알고 가셔야 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런 결과 없는 인생의 >
아빠는 스스로 움직이지만 스스로 움직이는 곳에
우리만 뿐이라는 점이
현실에서 소득을 크게 창출 없는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이 있는 것과 없는 상황과 다르지만
아이들만 모일 경우 말이 돌게 됩니다.
나쁜 놈이 여자 아이 들만 자리에 모아 놓았다고
악하게 헐뜯는 수도 있게 됩니다.

아빠는 우리가 미리 파악할 없는
일부의 여자들이 악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여자는 남자와 같이 주먹을 쓰지는 않지만
뒤에 가서 뜯는 경우가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뒤에서 헐뜯는 것을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됩니다.


<삶의 훼방자들>
그러나 이런 주변의 나와 다른 생각의 관점들이
나를 가로막으며 나의 길을 헐뜯는 입장에서 
몰이해 속에서 헐뜯는 말로 계속 입에서 입을 통해
타인의 귀에 와전되어져 들려질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피해를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려움이 수반되는 길이 됨을
그들이 알면서도 적들은 그들의 악의적 교란 행위로서
우리 행보를  앞과 뒤에서 가로막고 해코지 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치명적인 가해 행위로 적의 악의적인 훼방 행위가
그런 여건을 활성화 시키는 돈줄을 끊게 되는
악조건의 상황 만을 낳는 그런 적들도 의도된 악한 행위로
계속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낳게 된다는 점입니다.

적들에 의해서 돈줄이 끊겨지는 나쁜 여건 만이
우리를 연속적으로 더욱 괴롭힐
전진도 새출발도 불가능한 상황만이 오게 되고
그로 인해 예견치 못한 불행만이 이어지는 상황도
배제할  없는 상황이 수도 있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일일이 뒤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소한 일이라 생각하고 관심을 갖지 않고 살게 되지만
악마들이 뒤에서 말하는 악한 참소가 
일부 악한 심성을 가진 여자들의 비난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현실 뒤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상황에서
거의 우리가 가는 길이 지체되는 이유가 무엇인 가를
정확한 관점에서 파악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대다수의 신앙인들이 걷는 어리석은 생활 방식>
우리가 악마를 기도로 죽인 다고
말을 하는 사람도 일부 있지만
그것은 생각을 낳는 그런 생각에 그칠 뿐이지요.
그것이 우리들의 신앙 생활이 낳는 어리석음 이었지요.


<이방인의 정확한 대처로서 삶의 적극적 대처 방식>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그렇게 살지 않았지요.
대적자들과 훼방자들이 일어날 나서서
삶의 기회를 박탈해 싹을 잘라 죽이고 제거 했지요.

그래서 결국 방해물이 사라지게 되지요.
사람들의 길이 어떤 길을 행위로 선택하고
대처해 가는 행동 방식에 따라서
뚜렷한 가시적 결과가 나타나기도 하지요.

<결과 없는 신앙 생활이 오는 이유>
현실적인 난국 타개의 실질적 결과를 얻기 위해서
직접적인 행위를 통해 결과를 얻어 내려 하지 않고
실질적인 반격적 행위는 포기하려 들고
기도로만 해결하려고 살았지요

내가 걸어가는 신앙의 길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를
모르고 막연히 생각하며 그저 기도만 하면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 된다고만 생각하고 있지요.






Microsoft OneNote 2016에서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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